북한에서 마약생산 실체험담

북한에서 마약생산 실체험담

형수님 0 1275

백도라지농장(양귀비전문농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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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에서 9열차를 타고 19시간 만에 혜산역에 도착하였다. 금수산의사당경리부 산하의 공장, 기업소들에서 선발된 수 백 여명의 인원들 속에 나도 속하여 여기에 도착했다.

우리의 목적지는 백두산개마고원의 주변일대의 거의 전부를 차지하고 있는 백도라지농장이었다.

평양에서 떠나기 10여일 전에 본부당 회의실에서 당비서가 김일성의 1월 8일 방침(1990년 1월 8일방침)이라면서 그 내용을 전달하였다.

내용을 요약하면

(김일성의 1.8방침내용)
"양강도 농촌경리위원회산하의 대홍단종합농장과 백암종합농장을 금수산의사당경리부에 이전하여 백도라지 전문농장으로 전환한다.

양강도의 해발고가 높은 땅에서 농작물의 수확고가 낮아 식량해결이 어렵지만 아편(양귀비)를 심어 다른 나라에 내다 팔면 많은 외화를 획득할 수가 있다.

양귀비를 백도라지로 명명하여 부르도록 한다.

백도라지 생산은 전적으로 금수산의사당경리부가 맡으며 생산된 양귀비 열매의 진액 가공은 나남제약공장이 맡는다.

생산된 아편제품은 중앙당39호실에서 수출을 책임지고 외화를 벌어들인다."

금수산의사당경리부는 김일성과 그 일가친척들의 먹을거리와 공산품, 북한에서 당과 정부에서 진행하는 모든 행사에 필요한 식료품들을 책임지고 생산하는 북한에서 주석부라고 불리는 막강한 세력을 행사하는 기업으로서 전국에 특수농장들과 공장들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지방농촌경리위원회들의 재정난으로 농기계와 농약보장이 어려운 상황에서 금수산의사당경리부에로의 농장이전은 양귀비를 대대적으로 생산하는데서 필수적인 것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1990년 5월 23일. 평양을 떠나 2박3일만에 도착한 곳이 서두수발전소가 위치한 백암종합농장 산하의 원봉분장의 4작업반이었다.

작업반 선전실은 이깔나무로 지은 목조건물이었고 가운데 통로를 중심으로 양쪽으로 판자를 깔고 잘 수 있게 하였다.

고산지대 내륙지방의 밤은 찬 기운이 심하여 나무난로로 방을 덥혀야만 하였다.

3개월 전에 1차로 동원 나온 인원들은 우리가 도착하자 교대하고 집으로 가게 되어 얼굴들에는 웃음이 사라 질줄 몰랐다.

그들은 봄에 양귀비 씨를 뿌려 지금껏 가꾸어 왔고 우리는 열매의 진을 따서 1차가공(진액을 졸여서 고체화하여 반환)을 하면서 밭을 가꿔야 했다.

평양의 룡성특수식료공장(428공장), 력포유리공장, 평천상표공장, 금수산연구소, 태평술공장 등 의사당경리부산하에서 근무하는 농사 무경험자들인 우리들은 1월8일 방침으로 3개월씩 교대로 마약생산을 위한 양귀비농사를 하러 북방고산지대에서 땀을 흘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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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5시면 기상나팔을 분다.

군대 같은 규율이 필요하다고 강조되면서 인원을 소대, 중대, 대대, 연대로 편성되었다.

가족에 편지를 쓰거나 다른 사람들을 만나도 양귀비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말라는 주의를 받았고 백도라지라는 단어만 기억해야만 했다.

백도라지를 심은 밭에 2명씩 짝을 지어 새벽부터 정오 전까지 아편 진을 땄다.

한명은 면도날로 만든 ‘칼’로 열매의 껍질을 돌려가며 얇게 베면 뒤로 한사람이 따라 나오며 손가락으로 진을 밀어 닦아내서 작은 병에 담군 하였다.

오전에 작업이 끝나면 조별로 채취한 진액을 계량하여 바치는데 그 수량으로 실적총화를 하였다.

실적이 낮으면 김일성의 방침관철에 대한 무조건성이 부족하다는 평가로 질책을 받았고 실적이 높은 사람은 충성심이 높다는 평가와 함께 상금을 주기도 했다.

그 주변에 사는 사람들 중에 1988년에 평양에서 추방되어 가족과 함께 농민으로 전락된 사람들이 많았다.

1989년에 평양에서 진행된 제13차세계청년학생축전을 맞으며 평양시에서 지방으로의 추방을 대대적으로 단행했는데 그때 거의 대다수가 양강도의 고산지대농장들에 농민으로 직종을 찍어서 추방시켰다.

우리가 동원 나갔던 한 개 농장에도 2천여세대가 추방되어 왔다고 하는데 거의 타락한 상태였다.

다시는 도시에 나갈 수 없게 농민이라는 성분을 자식한테 물려줘야만 하는 북한의 성분고착정책(부모가 농민이면 그 자식들도 농민으로 대를 물려야 하며 일단 노동자나 공무원이 되었더라도 농촌연고자라는 이유로 다시 도시에서 농촌으로 강제이주가 되는 김정일의 방침으로 세워진 북한의 강제적인 주민고착정책)과 추방가족이라는 동네 주민들의 차별화에 정신적인 고통으로 마약을 쓰는 사람들이 많았다.

우리가 다른 밭에서 일하는 틈을 타서 몰래 진을 따거나 오후에 진을 졸이는 현장에서 조금씩 얻기도 하는데 의약품이 전혀 공급되지 않는 북한의 농촌실정에서 그들에게는 ‘만병통치약’으로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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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압록강과 두만강을 거쳐 중국으로의 아편밀수가 성행되기 시작하면서 시장가들에서도 암거래로 판매되었다.

1그램에 북한 돈으로 60원 정도였는데 당시 월급이 180~250원 정도인 노동자들에게는 아름찼다.

북한전역으로 확대된 마약중독자들로 하여 1999년에는 김정일의 지시로 북한군 보위사령부 검열조가 양강도에서 대대적인 처형을 시작하였다.

당시 간부들 사이에도 아편이 뇌물로 오갔고 식량난으로 굶어죽는 가족을 보면서도 마약에 중독되어 가정을 버리거나 집에서 내몰린 사람들이 많았다.

사형장의 총성이 계속 울렸다. 경한 자들은 어디론가 실어 갔는데 치료한다면서 데려 갔지만 지금도 그들의 존재는 알려 지지 않고 있다.

국가가 백도라지를 장려하여 마약을 전파하더니 백성이 그 맛을 톡톡히 본 셈 이였다.

지금도 북한의 마약중독자들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 늘어만 간다.

백도라지농장의 출현으로 아편중독자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하였고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필로폰을 대외시장에 암거래 하여 외화를 벌려고 국가가 장려한 후과로 북한 전역이 필로폰(북한에서 얼음 혹은 삥두 라고 말함)중독자가 범람하고 있다.

1그램에 A급은 북한 돈으로 7~8 만원 정도 하는데 월급이 2천원도 안 되는 서민들에게는 부담이지만 장사꾼들과 밀수꾼들은 물론 간부들 속에서는 사용자가 많다.

보안원 들이나 검사들은 밤에 모여서 필로폰을 쓰고 죄인들을 심문하거나 고문을 하면 졸음도 안 오고 정신이 집중되어 좋다고 공공연히 말하는 실정이다.

예로 단천시 보안서(한국의 지방경찰서에 해당)의 수사과 지도원들은 저녁마다 단천역전 앞의 믿을만한 필로폰 장사꾼 집에 모여 초저녁에 4~5명씩 무리로 흡입하고는 밤새 죄인들을 재우지 않고 고문을 하는 것을 보면서 소도둑이 좀도둑을 조사하는 불공평하고 썩어 빠진 북한의 실상을 절감했다.

전 지역이 아편과 필로폰 등 마약에 중독되어 버린 북한이 운명의 마지막 걸음을 하고 있다.

같은 겨레가 영도자를 잘 못 만나 빈궁과 핍박, 마약이 성행하는 지옥 속에서 구원의 손길을 뻗치고 있다.

하나의 백도라지 농장으로 되어 버린 북한 군사파쑈독재, 일당세습독재를 결단하고 자유롭고 민주화된 살기 좋은 낙원이 되는 그날을 위하여 나의 작은 힘이라도 보탤 결심을 굳게 다지면서,

서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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