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강제송환, 그 고통 - 수기

북한 강제송환, 그 고통 - 수기

관리자 0 1219
기억하기조차 싫은 북한 감옥생활이다.
탈북자 유영식

탈북 후 연길에 계속 머무르던 중 연길 변방부대(국경 경비대)의 단속에 걸려 체포되었다. 미국 화폐와 소지품은 압수되었고 다음날 중국 지린성 화룡 감방으로 이감되었다. 화룡의 변방부대 감방은 북한 탈북자들만을 체포하여 북한에 강제송환하기 직전까지 구속시켜 놓는 곳이다.

감방은 5개정도 되고 한개 감방의 크기는 3평 정도이다.

감방마다 CCTV가 장착되어 탈북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빠짐없이 감시했고 감방 문도 이중 삼중으로 닫혀 있었다.

감방 안의 4면에는 탈북자들이 써놓은 낙서들로 원래 벽면의 색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강제송환 직전에 탈북자들이 써놓은 낙서들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개혁 개방만이 살길이다.’ ‘난 이제 조선에 가면 죽을 것이다.

그러나 두렵지는 않다.’ ‘마지막으로 어머니가 보고 싶다.’

‘여기 중국 사람들의 말을 믿지 말라. 그들이 우리를 조선에 송환시키지 않겠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나는 이제 조선에 가면 살길이 없다. 기회만 닿으면 또 다시 탈북 하겠다.’ 등 이었다.

옆방에서는 밤마다 어머니를 부르는 북한 여성의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려 왔다. 화룡 감방에 구속된 다음날 이곳 변방부대 책임자인 듯한 사람이 나를 심문하였다.

나는 감방 벽면에 쓰여 있던 ‘여기 중국 사람들의 말을 믿지 말라. 그들이 우리를 조선에 송환하지 않겠다는 것은 거짓말이다.’라는 문구를 읽었지만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 책임자에게 “나를 북조선에 보내면 나는 죽는다. 죽는 사람 살리는 셈치고 나를 송환하지 말아 달라”고 거듭 호소하였다.

그 책임자는 나의 말을 듣더니 “우리도 당신들이 북조선에 가면 혹독한 환경에 처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가능하면 보내지 않으려 한다. 당신을 북조선에 보내지 않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그 거짓말은 우리 모두를 북한에 송환할 때까지 계속 되었다.

그곳에 수용된 북한 사람이 십여 명이 넘었을 즈음 중국 변방부대에서는 탈북자들을 모두 족쇄로 연결하여 묶고는 범죄자를 이송하는 전용 버스에 태워 북한에 송환하기 위해 북한의 국경도시 무산으로 향하였다. 그때의 심정은 북한에 강제송환 되어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로 모를 것이다.

다시는 돌아오고 싶지 않았던 북한에 그것도 족쇄에 묶여 앞날을 조금도 예측할수 없는 정치범의 처지로 북한 보위부에 넘겨진다고 생각하니 미칠 것만 같았다. 우리들 탈북자들을 기다리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할 고통이었다. 이송 절차를 거치는 동안에도 머리를 땅에 박고 있어야 했고 입에 담지 못할 욕설과 뭇매를 당해야 했다.

이송절차를 마치자 우리는 무산 안전부 감방으로 끌려갔다. 무산군에는 보위부 감방이 별도로 없기에 시나 도에 넘기기전에 임시로 안전부 감방에 수용된다. 무산 감방에 들어서자 계호원(간수)들은 우리의 기를 바로 들인다면서 무작정구타를 가했다. 이 피를 말리는 구타는 일행 중 한 명이 피를 토하며 쓰러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10개의 원형이 마주 보도록 만들어진 무산 감방은 5개의 감방을 탈북자 전용으로 수용하고 있었다. 3평 남짓한 좁은 감방에 25명 정도의 탈북자들이 감금되어 있었다. 밤에는 너무 좁아 사람 위에 사람이 겹쳐서 쪽잠을 자야만 하였다.

음식물로는 강냉이 겨로 만든 가루와 싯멀건 소금물이 전부였다. 예심이 끝나지 않아 6개월가량을 그 곳에 갇혀 있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들의 모습은 너무도 앙상하여 흡사 해골을 보는 듯했다.

무산에 온 다음 날부터 보위부의 심문은 계속되었다. “남한 사람들과 접촉하지 않았는가? 최종 탈북 목적지가 어디인가?” 등이 집중적인 심문이었다. 살길은 오직 미국 친척들에게 돈을 얻어 다시 북조선에 돌아 오려했지 3국으로 달아나려는 생각은 없었다고 끝까지 우기는 것이었다.

감방 안에서는 하루종일 다리를 포개고 앉아야 했다. 조금만 움직여도 기합을 받아야 했으며 맨땅에 무릎을 대고 몇 시간 동안 있어야 했다. 그러다가도 계호원(간수)이 자리를 비우면 서로 어디서 잡혔는지 정보를 교환하며 살아서만 나가면 다시 탈북할 생각들을 하고 있었다.

탈북자들도 국경지대에 사는 사람들과 북한 내부 출신들과는 상당한 차이를 두어 취급하였다. 국경지역 사람들은 1개월 정도 예심을 받고 다른 의심되는 점이 없으면 석방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내부(국경지역 외의 지역)에서 탈북한 사람들은 조국 반역자로 몰아 정치범 수용소로 가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많은 탈북자들이 자유를 찾아, 혹은 굶어죽지 않기 위해 북한을 탈출하였다는 죄 아닌 죄로 그 악명 높은, 살아나오기 힘들다는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갔다. 무산 감방에 갇힌 지 10일 정도가 지났을 무렵 나는 거주지가 평양시이기에 평양시 보위부로 인계되었다.

평양시 보위부 감방은 1층과 2층으로 되어 있었는데 1층에는 예심중인 사람들이, 2층에는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갈 사람들이 갇혀 있었다. 보위부 감방은 일단 갇히면 친인척은 물론 그 누구의 면회도 허락되지 않으며 그 곳에서 죽어도 어디에 하소연 할수도 없는 곳이었다. 1층 감방에는 20개 정도의 감방이 있었는데 한 감방에 보통 6~7명의 정치범들이 갇혀있었다.

그들의 ‘죄목’도 다양했다. 독서회라는 조직에 연루되었던 사람들, 북한의 사회주의 체제에 반하는 청년조직 가입자들, 북한 사회는 미래가 없다고 말하다 잡혀온 대학 교수 등 가지각색의 직종과 죄목을 가진 사람들이 잡혀와 있었다.

감방에서는 사람들끼리 절대로 말하지 못하게 하였다.

감방사람들 속에서는 나와 같은 탈북자도 세 명이나 되었다.

러시아 시베리아에서 벌목공으로 있다가 붙잡혀온 탈북자도 있었고 중국의 수도 베이징까지 갔다가 체포조에 붙잡혀 온 사람도 있었다.

또 외국에 가보지도 못하고 탈북 하겠다는 말을 주위 사람들에게 했다가 고발 당하여 붙잡혀 온 불운의 젊은이도 있었다. 나와 같은 감방에는 70세 노인도 있었다. 그는 영양실조에 걸려 거의 죽어가고 있었으나 일체의 어떤 치료도 해주지 않았다.

감방에는 수용소에 가기 싫어 바늘과 젓가락 등을 스스로 삼켜버린 사람들도 몇 명 있었는데 그들이 아무리 복통을 호소해도 어떠한 조치도 취해지지 않았다. 1층에서 예심이 끝나면 참관인 한 사람도 없이, 또 변호사도 없이 보위부 사람들에 둘러싸여 형식적인 재판을 하고는 형량을 지워 ‘죄목’에 따라 정치범 수용소나 일반 교도소 등에 보내어진다.

감방 안의 한 사람이 우연히 반체제 청년 조직 가입자들이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가는 광경을 보았는데 어찌나 예심기간동안 시달렸는지 온전히 걸어서 나가는 사람은 거의 없고 시체처럼 실려 나갔다고 했다.

나는 탈북 전에 독일작가 루이저 린저의 ‘옥중 실기’라는 책을 읽었다. 그 내용을 보면 히틀러도 자기 민족에게만은 오늘의 북한에서와 같은 악행은 저지르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김일성이 일본 경찰과 중국 만주 군벌에 붙잡혀 감옥 생활을 한 것을 회상하여 쓴 글을 보면 일본제국주의도 또 만주군벌도 오늘의 북한의 보위부 감옥같이 참혹한 비인간적인 행위는 행해지지 않은 듯 싶다.

북한에 살아보지 않고는 북한의 반인간적인 모습을 알 수 없을 것이다. 보위부에서는 간수를 초병이라 불렀다. 그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감방사람들을 죽도록 구타했으며 우리를 사람이 아니라 짐승 취급하였다. 밤에는 정치범 수용소로 가게 된 사람들의 신음소리로 잠을 잘수조차 없었다.

기억하기조차 싫은 북한 감옥생활이다. 한국으로 오는 동안 나는 연길, 심양, 장춘, 베이징, 상해 등 중국 각지를 헤매고 다녔고 베트남과 미얀마 등지도 헤매고 다녔다. 나는 가는 곳마다 탈북자들의 눈물과 비애를 뼈아프게 느껴야 했으며 나와 같은 탈북자들의 눈물에 젖은 행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남북 최고 당국자들이 서로 만나고 남북 경협도 점차 확대되고 있다. 그러나 그 그늘에 묻혀 탈북자들의 생사존망이 외면되는 일이 있어서는 절대 안 될 것이다. 이 시대 가장 비참한 처지에 빠져 있는 탈북자들, 그들에 대한 세계의 모든 뜻 있는 사람들의 관심과 애정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탈북자 유영식(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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